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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atement
박생광은 우리나라의 불교 설화, 민화, 역사 소재 등을 주제로 한 채색화로 민족회화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진채화의 거장’이다.
그는 1904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진주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를 다녔고, 이때 한국 불교계의 거목이 된 청담 스님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시립전문회화학교 (현 교토예술대학)에서 일본화를 공부하였으며, 조선미술전람회, 일본미술원전 등에 출품하여 작품을 인정받았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 작품 활동을 하며 ‘백양회(白陽會)’ 창립전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7년 서울로 상경 후 이듬해 홍익대, 경희대 등에 출강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74년 일흔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후 1977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과 동시에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 시기부터 종전에 쓰던 ‘내고(乃古)’란 호를 ‘그대로’로 바꾸고, 작품 제작연도를 서기에서 단기로 바꾸어 한글로 표기하였다.
1981년에는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 이후 민화적이고 토속적인 박생광 특유의 화풍을 정립하였고, 같은 해 <토함산 해돋이>가 제17회 중앙미술대상 예술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1982년 78세 나이에 인도의 불교 유적지 및 힌두 사원 등을 순례하면서 인도 미술협회와 인도 한국대사관 주최로 뉴델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인도 여행 이후 《혜초 스님》, 《청담 대종사》, 《명성황후》, 《전봉준》등을 발표하며 방만한 스케일과 영(靈)과 속(俗), 환영과 실재가 혼재하는 초월적 시공간을 보여주었다.
박생광은 1984년 서울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85년에는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 전에 특별 초대 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후두암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그가 타계한 지 1년 후인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1주기 회고전을 통해 총체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주홍색과 감청색의 대담한 색채와 환상적이고 복합적인 분위기를 주는 박생광의 대작들은 관람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한편, 한국 채색화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다.
* 참고자료 : 박생광 [朴生光] (두산백과), 박생광 [朴生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Professional Experiences
2021 고(故) 박생광의 ‘무속’, 교보아트스페이스
2019 박생광展, 대구시립미술관
2018 내고 박생광: 대안동 216번지에서,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2004 유작전, 부산 시립미술관
2004 색 그대로 박생광, space*c
2003 이영 미술관 주관 박생광 작품전, 바르셀로나 성 아그스티 문화센터
1993 유작전, 다보성 갤러리
1986 1주기 회고전, 호암갤러리
1984 개인전, 미술회관
1981 개인전, 백상 기념관
1979 개인전, 마산 동서 화랑
1977 개인전, 부산 원 화랑
1977 개인전, 진 화랑
1975 개인전, 동경 채호당, 상은본점, 한국문화원 등
1932 개인전, 동경 은좌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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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1923 일본 교토회화전문학교 일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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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ard
1985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1981 제17회 중앙 문화대상
1977 제32회 봄의원전(春の院展) 입선
1975 제30회 봄의원전(春の院展) 입선
1974 ~ 1976 제59-61회 일본 미술원전 입선
1963 경상남도 문화상
1940 ~ 1941 제26-27회 일본 미술원전 입선
1935 대일 미술전 입선
1934 명랑미술연맹전 입선
1930 ~ 1931 제9-10회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
1923 ~ 1924 제2-3회 조선 미술전람회 입선
큐레이터 노트
박생광은 단색조의 모노크롬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1980년대 초반, 민화를 비롯하여 불화, 무속화 등에서 비롯된 토속적 이미지들을 강렬한 색깔로 표현해 당시 화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그의 회화 양식의 변천은 4기로 구분되는데 1950년대 후반기까지의 수련기인 1기, 50년대 후반부터 1974년까지 추상화 시기인 2기, 1974년부터 1977년까지의 2차 도일 시기(渡日時期)로 다시 구상(具象)으로 전환하여 일본화의 평면적이고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성향을 보이던 3기, 마지막으로 1977년 이후 한국적인 소재의 추구 시기인 4기이다. 그의 회화는 4기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이르는데,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초기의 일본화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한국적인 소재를 전통적인 색채와 현대적 조형성으로 표현하였다.
한국적 색채를 창조하였다고 평가받는 박생광은 우리나라 채색화 부분에 새로운 가능성과 활로를 제시하였다. 그의 작품은 불교 설화, 무속 설화 혹은 불승이나 무녀를 모델로 하여 환상적이고 생동감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그의 무속화는 불화적 감성과 더불어 민화의 자유로움을 모두 갖추었으며, 이에 한국적인 강렬한 색채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주로 오방색(五方色) 중심의 원색 그리고 주황색 윤곽선을 주로 사용했는데, 오방색에서 중앙을 의미하는 황색은 무속적 느낌을 표현하는 동시에 난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화면 전체를 제어하여 통일성을 주는 역할을 한다. 박생광은 이런 강렬한 오방색을 사용하여 한국의 전통건축인 단청, 고려시대 불화, 조선시대 민화 등의 정신을 계승하며 가장 한국적이면서 서민적인 색채를 표현하였다.
그가 살아온 20세기는 한국 역사상 가장 격변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를 겪으며 그린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화로서 표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그가 말년에 남긴 역사화 시리즈는 서민 중심의 역사관, 그리고 민족의 비애와 항의를 소재로 하였다. 단순 기록화가 아닌 고발의 의미를 담은 박생광의 역사화는 한국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로 자리 잡았다.
다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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